김일성별장에서

전날에 화진포 휴양지의 주차장에서 차내 숙박을 한 뒤 다음날 아침 8시경에야 눈을 떴다. 약 10시간 정도 잔 것이다. 그만큼 어제 일정이 피곤해서 어제의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근처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갈아입고 건어물 판매점에서 오징어 한마리를 구워서 받았다. 호시 겁내씨는 여기 주차장은 군사 시설 보호 구역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차내 숙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나중에 다시 화진포에 오고 차내 숙박을 한다면 인근에 있는 해양 생태 박물관 주차장에서 하면 좋다고 귀띔했다. 그 아저씨는 주차장에서 건어물을 팔고 경비원의 역할도 하는 듯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오징어를 먹고 사이다를 마셨다. 그 뒤 김일성 별장을 방문하고 관람했다.1층에는 별장의 설립자인 셔우드 홀과 그의 가족에 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홀은 태어났기 때문에 숨졌다. 그의 어머니 로제타 홀은 그 후에도 조선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 의료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저는 2010년 비전 여행에서 중국에 가기 전에 팀원들과 함께 서울 양화 나루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를 방문했을 때 그의 가족이 거기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요즘은 그가 쓴 “조선 회상”이라는 책을 구입하고 일부 읽어 본 적도 있다. 그 때문인지 왠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훌륭한 일을 한 그에게 왠지 병 상련의 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별장 1층의 윌리엄·홀 부부의 사진(왼쪽)와 셔우드 홀 부부의 사진(오른쪽)1층에서는 셔우드 홀 가족의 기록물 이외에도 최근 남북 관계에 관한 보도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악수하는 2018년 남북 정상 회담의 사진도 있었다. 여기가 민족의 통일과 남북 관계에서 상징적인 장소임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기념비적인 장소가 되길 바라는 관계자의 의도가 느껴졌다. 별장 1층에는 별장의 유래와 함께 셔우드 홀의 일대기(연보)를 쓴 안내판도 있었다. 이 별장은 일제 시대에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일본 군부의 비행장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강제 철거하고 원산 해변에서 남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를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제공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당시 선교사로 휴양지 이전에 대한 실행 위원이었던 셔우드 홀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공포 정치를 피하고 조선에 귀순했다 건축가 베버에 별장 건축을 의뢰했다. 건설 초기에는 선교사를 위한 예배당으로 이용하고, 셔우드 홀은 가족과 친구가 1940년에 추방되기 전까지 별장으로 사용했다. 해안 절벽 위에 솔밭 속에 우아하게 위치하는 모습에서 “화진포의 성”으로 불렸다. 그 후 1948년부터 1950년 북한의 남침 이전까지 북한의 귀빈 휴양소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김일성 주석과 그 아내 김정숙(김·정숙이)씨 아들 김정일(김·김정일)씨, 딸의 김경희(김·교은히)씨 등이 여름 방학을 보낸 장소에서 그동안”김일성 별장”로 널리 알려졌다. 별장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김정일이 어릴 때 계단에 앉아 찍은 사진이 설치되어 있다. 만약 북한의 김정은(김·정은)위원장이 이곳을 방문한다면 부친과 조부의 흔적이 새겨진 여기서 큰 감격을 느끼기에 틀림 없다. 지금도 김 위원장은 방학 때 원산에 있는 휴양지를 자주 방문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2층에는 별장의 역사와 유래에 관한 전시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입구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것은 왼쪽 벽난로였다. 별장을 건축한 독일인 건축가 베버(Weber)가 건축주였던 셔우드홀에게 자랑하며 자신 있게 소개한 ‘자수정 벽난로’. 벽난로 앞에는 ‘조선회상'(25장 화진포 성)에 있는 아래 글자를 옮긴 팻말이 설치돼 있었다. 난로에는 동굴 속에서 채취해 온 수정암이 쌓여 있었다. 그는 벽난로가 얼마나 불을 빨아들이는지 보여주기 위해 불을 질렀다. 춤추는 듯한 불길은 벽난로에 붙어 있는 수정에 찬란하게 반사되었다.내가 조선회상의 해당 문구를 확인하기 전에는 여기서 말하는 그가 셔우드 홀이고 이 문구는 그의 아내 마리온 홀이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상을 읽어보니 여기서 그는 웨버였고, 이 글은 셔우드홀이 쓴 것이었다.

별장 2층 벽난로(왼쪽)와 침실공간(오른쪽) 벽난로 옆에는 남성 인민복과 여성 한복이 전시돼 있었고 사무용 책상과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셔우드홀 부부와 김일성 일가가 휴식을 취하며 환담했던 장소임을 짐작케 하는 소품이었다. 2층에는 가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거실, 침실 공간과 함께 식사 공간이 있었다. 별장이 원통형 건물이다 보니 테라스도 원통형이었지만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원통형 테라스가 식사 공간이자 거실(응접실) 역할을 했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나중에 남북정상회담이 화진포에서 열린다면 이곳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서 회담 장소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동해와 화진포의 경치는 일품이었다. 비록 소나무 가지 때문에 일부가 숨어 있긴 했지만 나는 잠시 그곳에서 서성거리며 동해와 화진포를 바라보았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빠져나가자 벤치가 있었다. 옥상은 평평하고 넓었다. 셔우드홀 가족이나 김일성 가족이 손님(방문객)을 접대하는 연회장이자 회식 장소로 사용한 것 같았다. 옥상에는 화진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올라가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동해를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이승만 별장도 보였다.

김일성 별장 옥상에서 바라보는 화진포(왼쪽)와 동해(오른쪽). 화진포 인근 숲으로 둘러싸인 이승만 별장이 보인다. 1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별장을 천천히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일행과 함께 있었고 다른 일정도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우리 민족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장소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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